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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순대국을 먹을 때 가끔 생각나는 분

by rainbowbrite 2020. 10. 18.

 

언제 가도 맛을 보장하는 순대국 집이 집 근처에 있는 건 큰 행운이다. 오늘 오후에 순대국을 포장해다가 집에서 끓여 먹었다. 포장해서 집에서 끓여 먹으면 직접 가서 먹는 것 보다 맛이 좀 덜하긴 하다. 일반 그릇에 담아 먹다보니 금방 식기도 하고, 뚝배기가 주는 먹음직스러움이 없으니 좀 아쉽다. 그래도 코로나 시대에 식당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들어가서 먹느라 씨름하는 것 보다는 포장해서 맘 편하게 먹는 편이 훨씬 낫다. 

 

돼지 머리고기가 들어간 순대국을 처음부터 즐겨 먹었던 건 아니다. 순대국에 맛 들리게 한 식당이 있었는데, 20대 중후반 부천시 오정동에 있던 순대국집이었다. 간판도 그냥 단순히 ‘순대국’이 전부였다. 부천은 내 생활권이 아니었는데, 그때 여자친구가 일하던 곳에서 가까운 곳이었고, 직원들과 와봤는데, 맛있었다고 나를 거기로 데리고 간 것이다. 그곳 순대국이 정말 좋았던 이유는 국물이 너무 구수했고 머리 고기도 살코기 위주로 넣어주던 곳이라 돼지머리 고기 비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정말 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 아주머니, 아저씨가 너무 친절하시고 인상이 좋았다. 살다보면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아주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냥 왠지 모르게 저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 어쨌든 내게 그분들이 그런 분들이었다. 

 

여자친구가 직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면서 그 곳에 더는 안 가게 되었다. 순대국만 먹으러 가기엔 사실 좀 먼 거리였다. 직장을 옮길 때 그곳을 못 가게 된게 아쉽다는 얘기도 나누었던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추억 속의 맛집으로 남게 되는 줄 알았지.

 

그런데 몇 년 뒤에 TV를 돌리며 보다가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걸 우연히 보게 됐다. 익숙한 얼굴이다 싶었는데, 딱 그 분들이었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을 조명하는 프로였는데, 아주머니가 암 투병을 하고 계셨다(말기 암이었다). 너무 놀랐고, 그 분들의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너무 속상했다. 화면에 비친 아주머니 모습은 여전히 인자하고 평안해 보이셨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아주 차분하게 말씀을 잘 하셨는데 그런 모습이 더 속상했다. 

 

그 순대국집에 가면 가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딸이 구석 테이블에 앉아 공부할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엄마와 대화하는 걸 잠깐 들었는데, 컨버스 운동화 하나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딱 들어봐도 어렵게 꺼낸 얘기 같았고, 딸의 말을 듣고 아주머니가 얼마냐고 물으셨다. 3-4만원 정도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좀 비싸니까 다음에 사주겠다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딸은 더 조르지 않았다, 착하게도. 얘기를 들으며 밥을 먹다가 앞에 앉아 있는 여자친구한테 작은 목소리로 ‘내가 하나 사주고 싶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그때 그곳의 음식과 그 곳의 사람들이 참 좋았다. 

 

중학생이었던 딸은 아마 지금 그때 순대국을 먹던 내 나이가 되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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