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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어머니의 자서전

1-4 The Autobiography of My Mother

by rainbowbrite 2014. 8. 15.

내 기억으론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그날은 편지 쓰는 법을 배웠다. 보통 편지는 총 여섯 부분으로 나뉘는데, 보내는 사람의 주소, 날짜, 받는 사람의 주소, 인사말이나 안부, 편지의 본문, 마무리 짓는 말이 그것이다. 나처럼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여자에게 편지 쓸 기회가 없다는 건 뻔한 일이다. 실수를 하면 맞기도 하고 폭언을 듣기도 했지만, 편지 쓰는 법을 배우고 실제로 써보면서 느꼈던 만족감은 실로 엄청났다. 그때는 편지를 쓴 사람의 불평이나 관점, 즐거움이 뭔지 전혀 관심이 없어도 그 편지를 베껴 쓰는 것이 그렇게 화나는 일은 아니었다. 너무 어렸던 나는 허영심이 칼처럼 위험한 흉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나만의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일곱 살이었던 나의 눈에 비친 내 삶에 대한 감정을 편지에 담아내고 싶었다. 난 아빠한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예쁘고 화사한 글씨체로 “사랑하는 아빠에게” 라고 시작했다. 맞고 혼나면서 배운 글씨체였다. 편지에서 나는 유니스가 때리고 욕하면서 학대한다고 일러바쳤다. 그리고 아빠가 그립고 정말 사랑한다는 말을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쓰면서도 자세한 내용은 쓰지 않았다. 그 편지는 그저 연약하고 상처받은 동물의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아빠는 내게 세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이에요. 아빠 말고는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요. 심한 말을 듣기도 하고 회초리나 돌로 맞기도 해요. 누구보다 아빠를 사랑해요. 아빠 구해주세요.” 이 편지는 절대 아빠에게 보내려고 쓴 게 아니었다. 사실은 꿈 속에서 발꿈치로만 봤던 그녀에게 쓴 편지였다. 밤마다 나는 그녀의 발꿈치를 보는 꿈을 꿨다. 언제나 발꿈치만 내려와 나를 맞이했다. 평생 발꿈치만…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아빠에게 보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보내는지도 몰랐다. 편지지를 쭉 펴면 여덟 개의 사각형이 나오는 식으로 세 번을 고이 접었다. 말 못할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학교 정문 밖에 있는 큰 돌 아래에 크기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서였다. 매일 하교를 할 때, 나는 아빠에게 쓴 편지를 그 아래에 숨겨놓고 다녔다. 쉬는 시간에 짬을 내거나 할 일을 다하고 선생님이 다른 일을 하는 시간을 이용해 남몰래 편지를 썼다. 학교 수업에 깊이 집중하는 척하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도움을 갈망하는 이 작은 외침은 내게 어떠한 위로도 주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내 삶의 비참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비참함이 누그러진다거나, 내 삶에 변화가 찾아온다거나, 반전의 상황이 찾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편지에 대한 비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만의 비밀 장소에 편지를 넣는 걸 로만이라는 남자아이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전부 가져가 버렸다. 그 애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공감해줄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었다. 약한 사람을 감싸주려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아이였다. 그 애는 내 편지를 선생님께 가져갔다. 그 편지에서 난 아빠에게 “모두가 날 미워해요. 날 사랑하는 사람은 아빠뿐이에요.”라고 적었다. 그러나 진짜 아빠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도 아니었을 뿐더러,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도 몰랐다. 편지에 쓴 것처럼 모두가 날 미워하고 아빠만 날 사랑하는 게 진짜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글씨로 끄적거린 내 편지를 본 선생님의 반응은 너무 혹독했다. 선생님은 내가 “모두”라고 쓴 말에 자기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자기만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내 편지에는 온통 거짓말과 근거 없는 모략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부끄러운 줄 알라는 둥, 내가 두렵지 않다는 둥 하는 얘기를 이어갔다. 그것도 다른 학생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은 내가 창피해한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내가 망신당하는 걸 보며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난 조금도 창피해하지 않았다. 뭔가 느낀 건 있었다. 삐뚤어지고 누렇게 변한 선생님의 이빨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됐을까 생각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의 겨드랑이부분은 땀으로 얼룩져 커다란 반달이 그려져 있는 것 같았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땀을 많이 흘리게 될는지, 냄새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선생님의 뒤쪽에선 거대한 암컷 거미가 알 주머니를 끌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을 뻗어 그 거미를 내려치고 싶었다. 왜냐하면, 지난 밤 내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몰래 입가에서 침을 빨아먹다가 세 방이나 물고 달아난 거미와 이 놈이 같은 종인지, 아니면 친척 뻘 되는 종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밖에선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고, 양철 판으로 만든 지붕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은 자기가 떳떳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내 편지를 아빠에게 보냈다. 선생님의 사랑어린 잔소리를 내가 증오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진 건 내가 가진 우월감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그녀는 내가 사랑과 증오, 두 가지를 잘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지금까지도 난 그 두 가지를 잘 구분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잘 못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과 증오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선생님이 내게 말을 쏟아내고 있을 때, 나는 선생님의 얼굴을 유심이 관찰했다. 얼굴을 보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진짜인지 아니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언제나 내게 쏟아낸 가혹한 말들이 사랑에서 우러난 것인지도 알고 싶었다. 나는 선생님의 얼굴에서 사랑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도 너무 많은 나이였고, 그런 판단을 하기엔 너무 어렸으니까. 

그 당시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내가 저지른 일이 뭔지 잘 몰랐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몇 마디 말로 내가 처한 상황을 반전시켰다. 스스로 내 삶을 구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후로도 항상 내 입장을 내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난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리만치 자각해나가기 시작했다.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어떻게 하면 그걸 얻을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게 뭔지, 즐거워하는 게 뭔지도 알게 되었다. 별 생각 없이 내뱉은 유치한 엄살이 내 삶을 바꿔놨다. 그리고 난 그런 말이 통한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