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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어머니의 자서전

1-5 The Autobiography of My Mother

by rainbowbrite 2014. 8. 15.

아빠는 교도관 제복을 입고 나를 데리러 왔다. 이런 복장으로 나타난 건 아빠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을뿐더러,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경찰로 근무하던 세인트 조셉 St. Joseph 에서 로조 Roseau 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나는 아빠가 올 거라는 얘기를 미리 들었다. 하지만 기대하진 않았다. 학교에서 내가 사는 집으로 가는 길 끝자락에 아빠가 서 있었다. 아빠를 보고 놀랐지만, 모른 척하며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토록 내가 아빠를 기다렸던 이유는 아빠의 재혼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빠가 빨래거리를 가지고 내가 사는 집으로 오지 않은 것도 재혼 때문이었다. 재혼한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재혼한다는 게 뭐지? 꼭 해야 하는 건가? 이런 생각들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아빠는 다시 결혼했다. 아빠가 내 손을 잡고 영어로 뭔가 말씀하셨는데, 아빠의 입술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 하나하나를 감싸는 것 같았다. 상냥하고 매력적인 데다가 심지어 친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빠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도 같이 살 수 있는 좋은 집을 구했다는 것. 새엄마를 보면 나도 좋아할 거라는 것. 그리고 이세상 그 누구보다 날 사랑한다는 것. 그 이유까지 언급했는데, 나를 보면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빠는 내가 새 집을 보면 좋아할 거라고, 그곳에 넓게 펼쳐진 하늘과 땅 마저 사랑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아빠가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반복해서인지 일곱 살 먹은 내 마음과 생각에 사랑이란 건 원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빠는 눈을 크게 뜨기도, 작게 뜨기도 했다. 아빠는 자기 말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난 믿지 않는데, 아빠라도 믿으니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그 새로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난 아빠를 믿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정말 이유는 없었다. 그때까지 난 그렇게 까다로운 아이가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그 이면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가 있겠거니 생각했었다. 

나는 유니스에게 돌봐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진심은 아니었다. 아니, 진심일 수 없었다. 진심을 담아 감사하는 법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유니스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작별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살던 세상이나, 지금 세상이나 내게 안녕이라는 말은 존재치 않는다. 너무나도 좁은 세상이니까. 내 모든 짐은 배낭 하나로 충분했고, 아빠가 타고 온 당나귀 등에 걸쳐있는 자루에 담았다. 나를 당나귀 위에 태우고 아빠는 그 뒤에 앉았다. 해질 무렵 당나귀 등에 타고 있는 대단한 남자 하나와 그의 작은 딸. 이게 7년 동안 살던 집을 외면하며 마지막으로 보였던 모습이다. 활자로 덮여있는 종이 위에 작은 얼룩만도 못한, 그저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날이었다. 아빠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내 뒤통수가 이따금씩 아빠의 가슴에 부딪힐 때면, 제복 너머로 심장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제복을 입고 다가가면, 사람들은 두려워했다. 제복을 입은 사람이 다가온다는 건 십중팔구 유쾌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 아빠가 존재한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단지 아빠가 옷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아빠도 잘 안다는 것과 그런 일로 내가 신경이 쓴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과거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알면서도, 그 과거를 등지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새로운 경험을 나는 하늘이 준 선물로 생각했다. 등을 돌린다는 지극히 단순한 행동이 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일단 한번 해보면, 그렇게 힘든 일이었나 싶기도 하다. 내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지만, 내 안에서 그것을 가능케 할 꿈틀거림이 시작되었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만약 교실로 돌아간다면, 유니스의 집 마당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그녀의 침대에 다시 눕는다면, 그녀의 아이들과 다시 밥을 먹는다면, 그 어떠한 힘도 나를 짓눌러 무력감이 들게 하거나 속수무책으로 그 무력감에 수치심을 느끼도록 하지 못했으리라. 

길을 떠나면서 아빠 얼굴의 표정을 바라봤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걸 눈치챌 만큼 아빠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빠는 학교와 정반대 쪽으로 길을 나섰다. 쭉 뻗은 길이 생소했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구슬프게 하는 익숙함이 있었다. 굽은 길을 지날 때마다 초록이 짙은 나무들이 거침없이 가지를 뻗으며 맹렬하게 자라고 있었다. 수그러들 줄 모르는 그 초록은 굉장히 아름답기도 하고 굉장히 볼품없기도 했지만,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자체로 완벽해서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게 없었다. 길을 따라 나있는 벼랑은 경사가 급하고 위험해서 굴러 떨어지면, 죽거나 불구가 될 것 같았다. 오르막길이 끝나자 내리막길이 나왔다. 내리막길을 끝에는 같은 종류의 꽃들이 피어있는데, 왜 그렇게 피어있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항상 왼쪽으로 꺾이는 길이 나왔다. 

곧 하루가 저물 때의 빛깔이 세상이 덮이기 시작했다. 그 빛깔은 장례식 같기도 하고, 회색이나 보라색처럼 어둡기도 했다. 내 안에 자리잡은 슬픔은 더욱 선명해졌다. 내 삶은 슬픔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슬픔이 칠 년 동안의 내 지난 삶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난 마음을 놓지 않았다. 깊은 어둠은 예고 없이, 그러나 익숙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때도 난 마음을 놓지 않았다. 아빠는 한쪽 팔을 뻗어 나를 감쌌다. 찬 공기가 가득한 밤에 내가 보지 못하는 악령이나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에서 날 보호하려는 듯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감싸는 것 같았지만, 점점 강해져 강철로 휘어 감는 것 같았다. 그때도 나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우리는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마을에 도착했다. 어디에도 빛은 새어 나오지 않았고, 개 짖는 소리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아빠가 사는 집으로 들어가자 처음 보는 예쁜 유리 램프가 빛나고 있었다. 램프의 맨 아래 부분에 뭔지 모를 동물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안에 보이는 기름은 속이 다 보일 만큼 맑고 투명했다. 램프는 마호가니로 만든 선반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벽에 고정된 선반 밭침 끝 부분은 단단히 움켜쥔 동물의 발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2인용 의자 하나, 1인용 의자 두 개, 식탁보가 씌워진 작고 낮은 테이블 등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은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었고, 자그마한 분홍색 장미가 그려진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런 벽지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학교에 있는 책에서는 한번 본 적이 있는데, 가족과 함께 들판에 사는 작은 동물이 집안 일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굴 속에 자리잡은 집에 비슷한 무늬의 벽지가 발라져 있었다. 그것은 그저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려고 과장한 동물 이야기였다. 그러나 램프로 밝게 빛나고, 꿈에서나 존재 할 것 같은 이 방은 실제 아빠의 집이었다.

그 순간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우리 엄마를 잘 모른다는 그 기막힌 사실 말고도 모르는 게 많았다. 나는 아빠를 잘 몰랐다. 아빠가 어디 출신인지, 누구를 좋아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당나귀를 타고 와서 발을 내디딘 이 땅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도대체 내가 누군지, 어째서 내가 램프가 빛나는, 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방에 서있는지 몰랐다. 내가 모르는 것들이 거대한 바다가 되어 내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거대하고 힘찬 물살이 내 머리 속으로 계속 몰아쳤다. 내가 이제 죽었구나 확신이 들 때까지…

나는 혼절하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내 얼굴 바로 위에 모르는 얼굴이 보였다. 아빠의 아내였다. 그녀는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구와 비교를 해야 할지 몰랐지만, 내가 볼 때 그녀는 분명 악마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날 좋아하지 않았다. 내 눈엔 보였다. 그녀는 날 사랑하지 않았다. 내 눈엔 보였다. 그 순간 얼굴 빼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녀에겐 아프리카 사람과 프랑스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깊은 밤 자기 집에 있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머리를 풀고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그렇게 곱슬거리지 않는 머리였고, 한 가운데 가르마를 중심으로 두 갈래도 땋아 뒤 쪽에 핀을 꽂고 있었다. 입술은 추운 지방 사람들처럼 얇고, 보잘것없었다. 그녀의 검은 눈에서는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뭔가 속이는 눈빛이었다. 콧대는 화살처럼 길고 날카로웠고, 광대뼈도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날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얼굴에 그렇게 쓰여있었다. 내 영혼은 이 시련에 맞서기 위해 일어났다. 사랑이 없는 곳. 나는 이런 곳에서 사는 법을 알았고, 이런 분위기 또한 너무 익숙했다. 혹시라도 사랑이 있었다면, 나는 굴복하고 말았겠지. 사랑이 있다면 나는 무너져 버리고 말겠지. 하지만 나는 눈곱만큼의 사랑도 없는 곳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었다. 눈곱만큼의 사랑도 없는 곳에서 난 나를 위해 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 입으로 컵을 가져오며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정신이 좀 들도록 내게 차를 먹였는데, 사약을 먹는 것처럼 너무 썼다. 내 혓바닥은 단 한 방울도 더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쓰디 쓴 맛이 내 심장을 따뜻하게 데웠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의 눈은 서로 마주보지도 못했고, 어디 한 곳을 쳐다보지 못한 채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본능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짧은 복도를 지나 작은 방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거기가 내 방이었다. 아빠가 사는 집은 나 혼자 방 하나를 차지해도 될 정도로 넓었다. 이 작은 변화 하나가 곧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나는 개인공간을 갖게 됐다는 사실에 별 문제 없이 적응했다. 내 방을 비추고 있던 램프의 크기는 이제는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지금의 내 주먹 정도였다. 작은 원목 침대도 하나 보였다. 코프라(코코넛 과육을 말린 것)로 채워진 매트리스는 하얀 시트로 씌워져 있었고, 네모 반듯하고 낮은 베게도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세면대 위에는 대야 하나와 물이 가득 담겨있는 항아리가 있었다. 수건은 없었다. (그때 나는 혼자서 제대로 씻지 못했다. 아무튼, 결국 욕을 먹으면서 씻는 법을 배웠다.) 벽에는 그림이 걸려있지도, 벽지로 도배되어있지도 않았다. 페인트 칠도 하지 않은 맨 나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 방은 지극히 평범했지만, 전에는 그 필요조차 느껴보지 못한 걸 내게 채워 주었다. 바로 고독이었다. 나 홀로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이곳에서 작디작은 내 자아는 육체와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가슴이 미어져 울고만 싶었다. 너무나도 외로웠다. 불안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매 순간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아빠의 아내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램프를 껐다. 그때 그녀는 프랑스어 방언으로 얘기 했는데,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영어를 썼다. 우리가 알고 지내는 동안 그녀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고, 영어나 프랑스어가 아닌 방언을 쓰면서 나를 그림자처럼 존재하지 않거나 영원이 밑바닥에서 수치스런 삶을 사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빠와 함께 그들의 방으로 갔다. 발소리가 점점 작아질 정도로 멀었지만, 소리가 천장의 빈 공간으로 타고 올라가 말소리가 울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아빠와 그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감정 없는 대화였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다가 짧게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잠에 빠져들어 입에서 숨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엄마가 나오는 꿈을 꾸려고 잠자리에 누웠다. 그 꿈을 꾸게 될 거라는 것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다라는 것도, 그 꿈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끊임없이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오직 발꿈치와 하얀 드레스의 옷자락만을 보여줬다. 끝도 없이… 나는 꿈에서 밤새도록 엄마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너무 보고 싶었지만,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였으니까. 엄마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가사는 없었다. 그 노래는 자장가도 아니었고, 슬픈 노래도 아니었다. 내가 고단한 삶을 탓할 때, 나를 달래주는 노래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노래였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버려진 보물상자에서 찾아낸 작은 보석과도 같았다. 기막히게 화려한 보석은 아닐지라도 만족감과 영원한 기쁨을 주는 그런 보석 같았다. 

잠자는 내내 나는 엄마의 발이 한걸음씩 사다리를 내려오는 모습일 지켜봤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때로는 콧노래로, 때로는 입을 활짝 열고 노래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까지도 엄마는 가끔 내 꿈에 나타난다. 그러나 더 이상 노래를 부르거나 입으로 어떤 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단지 과거처럼 사다리를 내려오는 엄마의 발꿈치와 하얀 옷의 끝 단 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