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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어머니의 자서전

2-1 The Autobiography of My Mother

by rainbowbrite 2014. 10. 27.

2-1

   아빠 집에서 옆 동네에 있는 학교까지 가는 머나먼 길을 속속들이 다 알게 돼도 어쩔 수 없이 다시 까먹을 수 밖에 없었다. 가는데 5마일, 오는데 5마일이나 걸어야 하는 이 길은 모든 아이들에게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혼자 다니는 아이가 없었다. 우리는 항상 무리를 지어 다녔다. 1년 내내 같이 다니는 아이라 봐야 열댓 명이 넘지 않았다. 물론 남자아이들이 더 많았다. 우리는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서로를 신뢰하지도 않았다. 부모들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모습이 좋은 예절이라도 되는 양 나도 똑같은 교육을 받았다. ‘이 사람들을 절대 믿어선 안 된다.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다른 부모들도 똑같은 말을, 심지어 똑 같은 시간에 자기 자식들에게 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 서로 비슷한 모습을 가진 사람들, 고통과 수치의 역사, 노예생활을 같이 겪었던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서로 신뢰하지 말라고 배워야 했던 것이다 서로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는 억지 같은 말이 더는 내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스레 불신해야 했던 이 사람들은 철저히 우리의 영향력 밖에 있었다. 그들을 굴복시키고 그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불신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 필요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은 우리가 서로에게 가진 많은 검정들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했다. 그 감정은 사랑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었고,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숨겨진 보화를 찾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걸 차지할 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랑이란 진심을 담아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뭔가 얻어내기 위해서 사랑할 수도 있는 거니까…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힌 동료가 되어 함께 걸었을 뿐이다. 눈 앞에 뭔가 나타났을 때, 그 위험을 바로 알아챌 수 없었다. 그래서 긴가민가한 것들이 진짜인 것처럼 다가왔다. 마을과 부모님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즉시 우리는 서로에게 바싹 붙었다.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언제나 공포에 대한 대화뿐이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항상 건너 다녔던 강 어귀에서 우리는 한 소년이 물에 빠지는 걸 목격했다. 그 이후에 우리의 학교생활이 원만했다면, 우리 대부분은 그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일로 둘러싸인 여자를 만나기 위해 헤엄쳐 가다가 불어난 물 속에서 사라져버린 그 소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곧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는 어둠 속에 산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구원이란 별 쓸모 없었다.

    그 소년이 물에 빠지는 걸 목격했다는 사실을 아빠는 믿지 않았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얘기하면 화를 내며 같이 다니는 아이들을 욕했다. 아빠는 그 아이들과 말을 섞지 말라고 했다. 아빠는 그 아이들은 좋은 가정출신도 아니고, 좋은 배경이 있는 아이들이 아니라고 했다. 아빠는 자기가 내 아빠고, 중요한 공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말로 화나게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내가 본 게 아니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난 내가 봤던 걸 여전히 잘 알고 있다. 아빠는 유령같이 창백해 보이는 할아버지의 피부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 피부 위에 진짜 피부를 한 겹 더 덮어 씌워야 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처럼 눈동자는 회색 빛을, 머릿결은 적갈색을 띄고 있었다. 할머니를 닮은 건 굵고 거친 곱슬머리뿐이었다. 할머니는 아프리카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곳이 아프리카에서 어디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안다 한들 좋을 것도 없었다. 아프리카 지도에서 노란색으로 표시되는, 어딘지 모를 지역 출신이셨다. 아빠는 갈색을 띄는 분홍색 손가락, 아니 분홍색을 띄는 갈색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내가 본 건 진짜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봤다고, 봤다고, 봤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아빠에게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아빠에게 하지 않은 얘기가 하나 더 있다. 혼자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무 위에 앉아있는 얼룩무늬 원숭이 한 마리를 봤다. 돌맹이 세 개를 원숭이에게 던졌는데, 원숭이가 세 번째 돌을 낚아채더니 내가 다시 던졌다. 나는 이마에 그 돌을 맞고 피를 철철 흘렸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처럼… 어떤 숲에 가면 붉은 열매가 피를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걸 들은 것 같았다. 내 상처를 보고 아빠는 학교친구 짓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내가 그 남자애가 누군지 밝히지 않고 보호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점에 아빠는 내가 아빠로부터 보호하려고 하는 아이를 피해 나를 루소(Roseau)로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분명 남자애들이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감정이 폭발하는 아빠의 모습은 나에 대한 사랑의 표현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모두 증오와 고립 가운데 살고 있다는 느낌을 다시 불러 일으킬 뿐이었다. 아빠의 얼굴은 다시 가면을 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젠 내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길 위에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늦은 오후 길게 뻗은 길 위해서 나는 태양이 바다 표면에 반사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엔 금방이라도 뭔가 이뤄질 것 같은 기대감이 항상 있었다. 마치 물 위에 비친 특별한 햇빛으로 만들어진 아담한 도시가 겉으로 튀어나올 듯 했고, 내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기쁨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가장 달콤한 캐슈열매가 자라고 곳이 이 길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캐슈열매의 과즙 때문에 입술에 물집이 생기기도 했다. 혀가 실타래에 묶여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잠시 동안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혀가 움직이지 않자 다시는 말을 못하게 돼서 고생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맛있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난 처음으로 춥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씨에서 한 낮의 덥고 맑은 날씨로 갑자기 변하는 걸 경험했다. 내 여동생이 이 길 위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그녀는 아빠와 아빠 아내 사이에 태어난 어린 아이였는데, 그녀가 미래에 결혼하게 될 남자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빠는 만나지 말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 여동생은 사고로 절벽에서 떨어졌다. 그 사고로 그녀는 다리를 절뚝거리는 불구가 되었고, 눈의 초점을 제대로 맞출 수 없게 되었다. 내게 행복한 기억일 수 없었다. 지금도 여동생의 고통을 깊이 느껴질 정도다.

   이 집에서 살게 된 이후 오래지 않아 아빠의 아내는 아이를 갖기 시작했다. 첫째는 남자아이를 둘째는 여자아이를 낳았다. 두 가지 일을 예측할 수 있는데, 그녀가 나를 홀로 내버려 둘 거라는 것과 그녀는 딸보다 아들을 더 귀하게 여길 거라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자기를 닮은 딸이나 여성을 홀대하는 것은 너무 일상적인 일이었다. 잘 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해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자기와 가장 닮은 존재를 경멸하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게 자연의 법칙이나 다름 없었다. 여동생의 삶에 주어진 현실에 나는 깊은 동정심마저 느꼈다. 그녀는 날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엄마에게 들은 얘기가 있을 테니까… 나는 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며, 그들의 재산을 홈치기 위해 호시탐탐 그 시기를 노리고 있는 도둑년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이 내 동생에게 통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날 믿어주지도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처음 배운 욕은 바로 나를 향한 것이었다. 아빠의 아내는 아빠가 나가고 둘만 있을 때면 항상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빠를 하나도 닮지 않았으니 나는 절대 아빠의 딸이 될 수 없다고 말이다. 사실 내 몸에서 아빠를 닮은 구석은 한 군데도 없었다. 하지만 여동생은 정말이지 아빠를 많이 닮았다. 붉은 색 머리결과 회색 눈망울이 아빠랑 똑같았다. 피부도 아빠를 닮았다. 엷은 붉은 색이었는데 머리카락의 붉은 색과는 다른, 마치 붉은 색의 띄는 흙과 같은 색이었다. 그러나 여동생에게는 아빠가 가진 침착함과 인내심은 찾을 수 없었다. 걸음걸이는 마치 전사와 같았고 쉽게 화를 내는 아이였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참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마음 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말로 옮겼다. 그래서 그녀는 날 볼 때마다, 내 존재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주는지 거침없이 쏟아냈다. 난 결코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불행이 내 불행보다 더 커 보였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살아있었다. 매일 그녀는 엄마를 봐야 했고, 매일 그녀의 엄마는 그녀가 사랑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우리 엄마는 죽고 없었다. 아빠의 아내는 아들을 무척이나 아꼈다. 그렇다고 사랑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걸… 그녀가 아들을 좋아한 건 자기와 같은 여자가 아닌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기가 아빠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강요받았다. 아빠처럼 걷는다거나 몸짓이 아빠와 닮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걸음걸이는 아빠를 닮았고, 몸짓도 아빠와 비슷했지만, 그런 걸음걸이와 몸짓은 아빠에 비교하면 그리 자연스럽지 않았다. 아빠는 살면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고 가꿨다. 아빠는 원하는 게 있으면,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만들어냈고, 스스로 자기 풍채를 만들었다. 아빠의 아내와 그 아들이 바라본 아빠라는 남자, 그 아이가 닮았으면 한 그 남자는 존재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바라본 그 사람은 아빠가 가진 욕망과 욕구였다. 그들이 관찰한 아빠의 인격은 아빠가 스스로 만들어낸 겉옷이었다. 그리고 결국 아빠는 그 겉옷을 너무 오래 입은 나머지 이젠 벗어버릴 수조차 없었다. 아빠의 진짜 모습과 아빠 자신도 모르는 아빠의 진짜 모습을 완전히 덮어버린 것이다. 아빠는 도둑이었고, 교도관이었다. 거짓말을 일삼았고, 약한 사람을 이용해먹었다. 이게 아빠의 참 모습이었다. 아빠는 평생 이런 식으로 살았지만, 말년에 자신이 교도관, 도둑, 거짓말쟁이, 겁쟁이였다는 걸 아빠는 몰랐다. 아빠는 자신이 자유로운 사람이요,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빠의 이런 믿음은 따뜻한 태양이나 푸르른 하늘처럼 눈 앞에 있는 실체를 믿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사실은 그 반대라고 아빠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빠의 아내와 그녀의 아들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이 어린 소년은 인생이 시작되면서부터 그 기원을 알 수도 없는 고통스러운 삶, 복제된 삶을 살았다. 이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면, 열한 살 때 이미 아빠와 똑같은 흰색 리넨 정장을 입었다. 그리고 너무 말랐고 너무 창백해 보였다. 자기 엄마와 똑 같은 검은 머리카락은 억지로 뒤로 넘겨져 있었고,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아이처럼 그 걸음걸이는 어색했고 불안해 보였다. 또한, 아빠는 믿지도 않는 신을 예배하러 가는 모습도 보았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고 자세히 이해하지도 못한 아빠의 모습을 닮으려고 온갖 애를 쓰는 남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쓰러움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래서 나중에 열아홉 살이었던 동생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난 그 죽음을 비극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비참하고 고문과도 같은 그의 삶이 이토록 짧았던 게 오히려 자비로운 일이라고 여겼다. 동생의 죽음은 길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죽었을 때, 그가 살았던 곳엔 무의미한 공간이 없었다. 그리고 남동생의 엄마와 슬픔과 아빠의 슬픔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왜인지, 무엇 때문인지… 그들이 애도하는 이 아이는 너무 소중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내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빠의 아내가 우리 사이에 만들어 놓은 긴 침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때로는 그런 침묵이 어떤 의미도 담고 있지 않았고, 가끔은 지독한 분노로 가득 차기도 했다. 때로는 나를 죽은 사람 취급하기도 했고, 살아있는 내 존재가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그녀의 욕구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녀는 날 사랑한 적도 없었고 처음 볼 때부터 살아 숨쉬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봤을 때, 진짜 나를 봤을 때, 나를 바라봤을 때, 내 존재를 깨달았을 때, 그녀는 내가 죽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나를 죽이려는 첫 번째 시도 –그녀는 내게 선물로 목걸이를 만들어줬고, 나는 그 목걸이를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개에게 선물로 줬다. 그리고 그 개는 내 대신 죽고 말았다. 이후, 두 번째 시도는 그리 열성적이지 않았다. 살고자 하는 내 욕구를 그녀가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정신 없이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아들이 죽었을 때, 나는 그녀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그녀에게 나는 바라볼 수 있는 대상도, 복수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었다. 나는 계속 삶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기 때부터 어떤 사람을 관찰하고 그 존재가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마치 꽃 봉우리에 맺힌 아직 피지 못한 꽃잎이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를 꼭 붙들고 있다가 이내 자연스레 서로를 놓아주며 펼쳐지는걸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 꽃이 가진 생명은 분명 놀라운 것이다. 눈과 입 꼬리에 경험이 모이는 것, 무게에 눌린 이마와 마음과 영혼의 중압감, 허리와 가슴에 두껍게 쌓이는 것,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신중하게 걷느라 걸음걸이가 느려지는 것, 이 모든 것을 관찰하고 주목하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관찰하는 사람, 주목하는 사람의 의 재미는 그들과 주목 받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기류이다. 그리고 난 어떤 인생도 완전하지 않다고 믿는다. 사랑을 정의 내리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기류 없이는 누구도 완전하지 않고 진정으로 온전하지 않다고 믿는다. 내 삶을 관찰하거나 주목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관찰하고 지켜봤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류는 지켜봐 주는 사람 없이 내게 다시 되돌아왔다. 그럼에도 나는 절망을 넘어 나 자신을 사랑했다. 내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랑도 괜찮았다. 아니, 그런 사랑이어야만 했다. 그 사랑은 선반 위에 너무 오래 놓여 있어 맛이 상해버린, 먹으면 바로 배탈이 나버릴 것 같은 음식을 맛보는 것 같았다. 보기에 썩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괜찮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내 생리혈의 끈적한 핏덩이를 처음 보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들어본 적도 없었고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12살 나이였다. 그러나 내 어린 마음에, 내 몸과 영혼에 그 모습은 기한이 완성된 운명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알고 있는 일을 대하듯 했지만, 의식적으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도 몰랐다. 처음엔 너무 끈적이고 빨갛고 엄청난 양이어서 단지 어떤 일을 미리 경고하는 징조나 상징으로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 모습은 내 생리혈 그 자체였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비치지 않을 땐 내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는 즉시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 당시 내 안에 있는 어린 자아는 내 아이를 갖는 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빵집에서 밀가루가 담겨 있던 봉투 네 개를 샀다. 세척하고 햇빛에서 표백을 하는 긴 과정을 고쳐 염색되어있는 상표를 제거했고, 네 개의 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내 내 두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내 피를 받아내는 휴지로 사용했다.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아빠의 아내는 내가 진짜 여자가 되면 나를 조심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그런 말을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내가 그녀를 여전히 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 내 몸의 감촉과 체취가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겨드랑이와 두 다리 사이에 거친 털이 나기 시작했다. 골반도 더 넓어졌다. 젖가슴도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가슴 사이에 깊은 골이 패였다. 머릿결은 길고 부드럽게 자랐고, 웨이브는 더 깊어졌다. 입술은 좌우로 넓게 퍼져 심장을 위에서 살짝 누른 것 같은 풍만한 모양이었다. 나는 오래되고 깨진 거울조각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집 아래 쓰레기 더미에서 찾은 물건이었다. 내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나중에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했을 뿐이다. 나는 누구든 내 몸을 바라봐주는 존재가 좋았다. 또한, 내 겨드랑이와 두 다리 사이에서 풍기는 냄새가 변했다. 난 이 새로운 냄새가 좋았다. 그 냄새는 마치 뭔가 서서히 발효되는 것처럼 톡 쏘는 날카로운 무엇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혼자 있을 때면 내 손은 항상 그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땐 그 손은 언제나 내 코에서 멀지 않은 곳을 향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난 그 냄새가 너무 좋다